칼 에드워드 세이건은 1934년 11월 9일에 미국의 뉴욕 주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재단사였으며, 어머니는 가정주부로 둘 다 유대계였다고 합니다. 칼 세이건은 어려서부터 명석했으며, 특히나 과학에 소질을 보였는데요. 한 번은 근처에 있는 공립 도서관에서 별에 관한 책을 달라고 했더니 칼 세이건의 수준을 얕잡아본 사서가 별에 관한 책이 아닌 연예계 스타에 관한 책을 꺼내준 일화가 있다고 합니다.



1951년 시카고 대학에 입학한 칼 세이건은 천문학과 천체물리학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합니다. 1959년에는 금성 탐사선인 매리너 호 계획에 도움을 주고 관여를 한 것을 계기로 NASA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1963년에 세이건은 하버드 대학교 천문학 강사로 초청되기도 합니다.

1968년 칼 세이건은 화가인 린다 살츠만과 재혼하고 코넬 대학으로 옮겨 정교수가 됩니다. 1969년의 아폴로 11호 발사에도 관여했지만, 7월 21일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창륙하던 그 역사적인 순간에는 위가 좋지 않아 수술대 위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칼 세이건은 소행성대 및 목성을 탐사하고 인류 최초로 태양계를 벗어난 우주선 파이어니어 10호 설계에도 관여를 했습니다. 그 중 외계에 보내는 인류의 메시지를 담은 알루미늄 판을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알류미늄 판에는 지구에 있는 남녀의 모습과 태양계에서 지구의 위치를 가리키는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네요.



1976년에는 칼세이건과 공영방송 PBS이 함께 13부작 과학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합니다. 1980년 9월 28일에 첫 방영된 코스모스는 큰 화제를 일으켰는데요. 전 세계 60개국에서 6억명의 시청자가 있었으며, 세계 방송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 중 하나였습니다. 여기서 해설자로 등장한 칼 세이건은 보이저 호의 목성 사진 같은 최신 자료와 다양한 세트를 이용하여 우주와 인간, 과학과 역사, 지구의 미래 등을 흥미롭게 펼쳐 보였는데요.

세이건은 학식은 물론 과학 저술가로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어 저서인 에덴의 용은 논픽션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칼 세이건의 소설인 콘택트는 여러 출판사 간의 경쟁 끝에 당시로선 사상 최대인 200만 달러의 선인세를 받고 더욱 유명해지게 됩니다. 1981년, 세이건은 린다와 이혼하고 코스모스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친해진 작가 앤 드루얀과 또 다시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후 칼 세이건은 과학저술은 물론 환경 및 정체 문제에도 관여를 하는데요. 특히나 냉전 말기인 1980년대에 세이건은 미국과 소련 양측에 핵겨울의 위험을 경고하기도 하였으며, 특히나 레이건 정부가 막대한 예상을 들여 추진하던 스타워즈 계획의 맹점을 알리면서 평화적인 사태 해결을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칼 세이건은 대중적 명성에 못지않게 전공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긴 과학자입니다. 칼 세이건은 40년이 넘는 활동 기간동안 단독 혹은 공동으로 500편이 넘는 논문과 저술 등의 자료를 발표하였는데요. 이는 약 한 달에 한 편 꼴로 발표한 셈입니다. 엄청난 양이머, 특히나 금성의 온실효과, 화성의 계절 변화 등에 관한 연구는 칼 세이건의 가장 훌륭한 업적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사실 칼 세이건은 개인 연구보다는 NASA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더욱 능력을 발휘하였는데요. 관측보다는 이론을 좋아하는 사람이있고, 한꺼번에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놓고 공동작업 하는 스타일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 생산성이 좋고 활동력이 넓었다고 합니다.


1990년대에는 낙태와 종교 같은 논쟁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해결사항을 제시하였으며, 과학자이면서도 합리주의자로 자신의 신념을 세우고 밝히는데 앞장 섰다고 합니다. 1994년에 칼 세이건은 백혈병의 한 종류인 골수이형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기독교는 물론이고 힌두교와 이슬람교 성직자들도 칼 세이건을 위 기도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불가지론자였던 칼 세이건은 죽음 앞에서도 끝내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지 않았으며, 1996년 12월 20일 칼 세이건은 62세를 일기로 사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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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 쯤, 대략 지금의 이라크 국토에 해당되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한참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은 통일되지 않았고 높이 성벽을 쌓은 도시들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마치 삼국지의 춘추전국시대처럼 메소포타미아 남부에는 우르를 비롯해서 키시, 이신, 우르크, 니푸르, 라르사, 라가시, 에리두 등이 대립하고 있었으며, 북부에는 아시리아와 마리라는 두 나라가 어깨를 겨루고 있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는 기원전 2330년경에 한 차례 통일된 적이 있었는데, 아카드의 사르곤 왕의 손에 통일이 된 이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르곤 왕은 압도적인 힘과 가혹한 통치로 한때 전 메소포타미아를 재패하려고 했지만, 역시나 힘으로만은 지배가 오래 유지되지는 않았는데요. 사르곤이 죽기 직전에 제국은 반란으로 들끓고 있었으며, 그 후 채 2대를 지나지 않아 메소포타미아는 또 다시 분열시대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함무라비는 메소포타미아의 중간쯤에 있는 바빌론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정확하고 자세한 생애에 대해서는 자료가 많이 남아있진 않지만, 1792년경 부왕 신무발리트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시대 군주들은 넘어갈 힘만 있으면 이웃나라를 침략했으며, 전쟁이 그칠날이 없었다고 하는데요. 함무라비도 재위 7년경 우르크와 이신을 정복하며 일찍이 전쟁터에 뛰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정복한 도시들의 체제를 정비하고 수많은 도시들을 하나로 잇는 운하와 도로를 설계하는 등 오랜기간 동안 내치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두각을 나타낸 군주는 아시리아의 샤마시아다드였습니다. 그는 그의 숙적을 제거하기 위해 남쪽의 함무라비와 손을 잡고 전력에 집중하였으며, 마침내 마리를 정복하고는 메소포타미아의 북부를 손에 넣기도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사르곤에 이어 통일제국을 세울 사람은 샤마시아다드밖에 없다는 말이 떠돌았으나, 1762년 갑자기 죽는 바람에 꿈으로 돌아 갔으며,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동안 힘을 축적해온 함무라비가 본격적으로 정복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함무라비에게 가장 힘든 상대는 남부의 대국 라르사였습니다. 그 당시 라르사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치고 올라갔으며, 바빌론은 중간지역을 장악하고 남쪽까지 세력을 뻗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동쪽에서 이란계의 엘람이 공격해 오면서 두 나라는 손을 잡고 엘람에 맞섰다고 하는데요. 결국 함무라비는 엘람을 무찌르고 여세를 몰아 라르사로 돌진합니다. 라르사 왕 리심을 사로잡음으로써 함무라비는 메소포타미아의 최강자로 군림하게 되는데요. 그 뒤 북부로 눈을 돌린 함무라비는 샤마시아다드 사후 다시 독립한 마리를 먼저 무너뜨렸으며, 차례로 아시리아의 항복을 받아내게 됩니다. 기원전 1751년 수바르투라는 작은 나나를 정복하는 것으로 통일대업은 끝나게 됩니다. 메소포타미아는 함무라비 왕 아래 다시금 하나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함무라비는 통일을 시키면서 사르곤이 밟았던 길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함무라비는 통일제국을 유지하려면 힘도 중요하지면 제도의 정비와 사상적 통일이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사르곤 시대에는 여러 도시들의 자치권이 폭넓게 인정되었지만, 함무라비 시절에는 재정권과 사법권을 빼앗아 중앙에 귀속시켰습니다. 공평한 세금과 병역 제대 마련에도 힘을 쏟았는데요. 또 한편으로는 언어의 통일도 꾀하여 아카드어를 국어로 삼고, 종교적으로도 벨 마르두크라는 이름을 메소포타미아의 전체의 최고신으로 숭배받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수넓은 영토를 통일하다보니 넓은 제국에서 발생하는 법률문제는 상당했습니다. 허나 그것을 모두 바빌론의 왕이 처리할 수는 없는 처지였는데요. 그래서 각지에 지방법정을 세웠으며, 왕을 대리하여 판결할 수 있는 사법관을 파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제국 어디서나 왕이 직접 재판하는 것과 같은 재판을 내리기 위해 함무라비 법전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모두 282조로 이뤄진 함무라비 법전은 1901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드모르강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세계 최초의 법전이라는 명예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 후 1947년에 그보다 150년 이상 앞서 만들어진 리피트 이시타르의 밥전이 발견되었지만 여전희 위대한 법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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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호메로스를 시작장애인으로 취급하는 이유는 바로 오디세이아의 제 8권에 등장해 트로이 전쟁을 노래하는 음유시인 데모도코스와 관련을 지었기 때문인데요. 이는 저자 호메로스의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한 사람이 대다수 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당시 사람들은 시각장애인들은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기억력은 더욱 뛰어나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호메로스의 출생지 또한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기 때문에 이오니아를 비롯한 그리스 일곱군데 도시국가가 저마다 호메로스의 출생지임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나온 지명들은 실제 위치를 두고 아직가지도 수많은 논의 오간다고 합니다.

 

호메로스의 최고 서사시를 뽑자면 단연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뽑을 수 있겠는데요.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는 서양 문학에서 최초의자 최고의 걸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기원전 8세기경에 구전으로 성립되었으며, 기원전 6세기경에는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추정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지닌 감동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느낄 수 있는 감동이 아니며, 오히려 그토록 오래된 작품임에도 짜임새 있는 구조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사실이 더욱 감탄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호메로스의 작품인 일리아스는 그리스와 트로이간의 전쟁을 다룬 서사시입니다. 황금 사과에서 비롯한 세 여신의 불화와 파리스의 선택, 지상 최고의 미녀 헬레네의 납치와 두주로 시작된 트로이 목마 등 수많은 호메로스의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일리아스는 이 유명한 신화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하지 않고 있는데요. 어느 고전학자는 어린 시절에 일리아스 번역본을 읽고 나서는 그 책을 판매한 서점 주인이 사기친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물론 전쟁의 기원과 경과에 대해서 설명이 나오긴 합니다만, 일리아스는 시간 순서가 아닌 중간에 회고 방식으로 설명되고 있었으며, 이것은 그리스 서사시의 특징인 유럽 역대 서사시의 특징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대신 일리아스는 10년여에 달하는 트로이 전쟁 가운데 단 며칠 동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서사시의 실제 주인공은 그리스 영웅인 아키레우스인데요. 서두에서 다루고 있는 아킬레우스는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인 아가멤논과 싸우고 나서 더 이상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며, 그 때문인지 이후 그리스군은 헥토르가 이끄는 트로이 군에게 처참하게 짓밟히게 됩니다. 그에 따라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아킬레우스는 앞선 맹세를 철회하고 전투에 복귀하여 헥토르를 죽이고 원수를 갚게 됩니다. 그 와중에 아가멤논, 오디세우스, 아이아스, 디오메네스, 헥토르 등 양편의 주요 영웅들의 용맹함과 지략에 관한 주제, 그리고 전투를 감상하며 종종 여기저기 참견하는 신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긴박감이 일리아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오디세아이 또한 오랜 방랑 생활 동안 주인공이 마주하는 기괴한 사건과 사물들이 출연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사실상 분량으로 따지면 일리아스 쪽이 더 많지만 내용의 풍부함으로 보면 오디세이아가 단연 압권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호메로스의 영향력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데요. 미국의 저술가이며 독서 관련 에세이로 유명한 클리프턴 패디먼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관해서 많이 언급한 바가 있는데요. 20세기 중반 당시로는 사상 최대의 군사 작전이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예로 들면서 그 작전의 최고사령관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회고록을 읽어보아도 일리아스 만큼의 웅장함을 느낄 순 없다고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이는 아이젠하워 장군의 잘못이 절대 아니며, 다만 그가 호메로스가 아니었을 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즉, 패디먼의 이 말은 호메로스의 위대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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