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 쯤, 대략 지금의 이라크 국토에 해당되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한참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은 통일되지 않았고 높이 성벽을 쌓은 도시들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마치 삼국지의 춘추전국시대처럼 메소포타미아 남부에는 우르를 비롯해서 키시, 이신, 우르크, 니푸르, 라르사, 라가시, 에리두 등이 대립하고 있었으며, 북부에는 아시리아와 마리라는 두 나라가 어깨를 겨루고 있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는 기원전 2330년경에 한 차례 통일된 적이 있었는데, 아카드의 사르곤 왕의 손에 통일이 된 이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르곤 왕은 압도적인 힘과 가혹한 통치로 한때 전 메소포타미아를 재패하려고 했지만, 역시나 힘으로만은 지배가 오래 유지되지는 않았는데요. 사르곤이 죽기 직전에 제국은 반란으로 들끓고 있었으며, 그 후 채 2대를 지나지 않아 메소포타미아는 또 다시 분열시대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함무라비는 메소포타미아의 중간쯤에 있는 바빌론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정확하고 자세한 생애에 대해서는 자료가 많이 남아있진 않지만, 1792년경 부왕 신무발리트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시대 군주들은 넘어갈 힘만 있으면 이웃나라를 침략했으며, 전쟁이 그칠날이 없었다고 하는데요. 함무라비도 재위 7년경 우르크와 이신을 정복하며 일찍이 전쟁터에 뛰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정복한 도시들의 체제를 정비하고 수많은 도시들을 하나로 잇는 운하와 도로를 설계하는 등 오랜기간 동안 내치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두각을 나타낸 군주는 아시리아의 샤마시아다드였습니다. 그는 그의 숙적을 제거하기 위해 남쪽의 함무라비와 손을 잡고 전력에 집중하였으며, 마침내 마리를 정복하고는 메소포타미아의 북부를 손에 넣기도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사르곤에 이어 통일제국을 세울 사람은 샤마시아다드밖에 없다는 말이 떠돌았으나, 1762년 갑자기 죽는 바람에 꿈으로 돌아 갔으며,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동안 힘을 축적해온 함무라비가 본격적으로 정복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함무라비에게 가장 힘든 상대는 남부의 대국 라르사였습니다. 그 당시 라르사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치고 올라갔으며, 바빌론은 중간지역을 장악하고 남쪽까지 세력을 뻗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동쪽에서 이란계의 엘람이 공격해 오면서 두 나라는 손을 잡고 엘람에 맞섰다고 하는데요. 결국 함무라비는 엘람을 무찌르고 여세를 몰아 라르사로 돌진합니다. 라르사 왕 리심을 사로잡음으로써 함무라비는 메소포타미아의 최강자로 군림하게 되는데요. 그 뒤 북부로 눈을 돌린 함무라비는 샤마시아다드 사후 다시 독립한 마리를 먼저 무너뜨렸으며, 차례로 아시리아의 항복을 받아내게 됩니다. 기원전 1751년 수바르투라는 작은 나나를 정복하는 것으로 통일대업은 끝나게 됩니다. 메소포타미아는 함무라비 왕 아래 다시금 하나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함무라비는 통일을 시키면서 사르곤이 밟았던 길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함무라비는 통일제국을 유지하려면 힘도 중요하지면 제도의 정비와 사상적 통일이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사르곤 시대에는 여러 도시들의 자치권이 폭넓게 인정되었지만, 함무라비 시절에는 재정권과 사법권을 빼앗아 중앙에 귀속시켰습니다. 공평한 세금과 병역 제대 마련에도 힘을 쏟았는데요. 또 한편으로는 언어의 통일도 꾀하여 아카드어를 국어로 삼고, 종교적으로도 벨 마르두크라는 이름을 메소포타미아의 전체의 최고신으로 숭배받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수넓은 영토를 통일하다보니 넓은 제국에서 발생하는 법률문제는 상당했습니다. 허나 그것을 모두 바빌론의 왕이 처리할 수는 없는 처지였는데요. 그래서 각지에 지방법정을 세웠으며, 왕을 대리하여 판결할 수 있는 사법관을 파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제국 어디서나 왕이 직접 재판하는 것과 같은 재판을 내리기 위해 함무라비 법전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모두 282조로 이뤄진 함무라비 법전은 1901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드모르강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세계 최초의 법전이라는 명예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 후 1947년에 그보다 150년 이상 앞서 만들어진 리피트 이시타르의 밥전이 발견되었지만 여전희 위대한 법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