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존스는 1837년 아일랜드 코크에서 메리 해리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1830년 5월 1일에 태어났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1837년 8월 1일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 확인됐을 뿐ㅇ니데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날을 그녀의 실제 생일이라고 간주하기도 합니다. 19세기 후반에, 아일랜드 주민의 대다수는 가난했고 농부들을 사로잡았습니다. 1845년 여름부터 농부들의 주식인 썩어가는 감자의 전염병이 썩기 시작했고 수백만 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고, 몇 년 동안 수백만 명이 살길을 찾아 신대륙을 찾아 건너갔다고 하는데요.


메리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성장해 사범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합니다. 1860년, 23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잠시 교사로 이직하여 후에 의상 제작사를 경영하였는데요. 이듬해 조지 존스라는 엔지니어와 결혼함으로써 메리 해리스가 메리 존스가 되었고, 이후 마더 존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남북전쟁과 노예해방 등 일련의 큰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평범한 가정주부의 삶에 대한 교육을 받은 연인이었는데요. 30세의 미망인 그녀는 시카고에 가서 의상 제작자로 일했으나 1871년에 재산을 모두 잃었다고 합니다.



1877년 시카고에서 발생한 대규모 파업으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직후, 당시 40세였던 메리 존스는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때 그 노동자가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고통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더 존스라는 이름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60세에 등장하게 됩니다. 1900년부터는 이름에서 메어리라는 이름을 없애고 편지마다 마더라고 서명했다고 합니다. 곧 동지들뿐만 아니라 적들도 그녀를 마더 존스라고 불렀습니다.


마더 존스는 전미광산노조(UMV) 소속으로 광산, 철도, 철강 등 주요 산업에 대한 파업에 관여해 왔습니다. 아직 조합을 결성하지 않은 회사에 몰래 들어가 조직하는 것이 그녀의 의무였는데요. 나이를 감안하면 결코 쉽지 않았지만 때로는 득이 되기도 했습니다. 평범한 할머니가 어떤 노동운동가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인데요. 그녀는 인자한 외모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때로는 육두구미까지 섞어 흠잡을 데 없는 대화를 나누며 신뢰를 얻기도 했습니다. 말과 몸짓, 욕설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외국인 이민자 광부들까지 매료시킬 정도였다고 합니다.



연설은 마더 존스의 가장 큰 무기였습니다. 그는 회의에서 박애주의자로 소개되자 말씀을 바르게 하라, 나는 박애주의자가 아니라 까다로운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며, 그녀가 기르던 특이한 말들은 노동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었습니다. 1890년대 후반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그녀는 주로 탄광 노동자들을 위해 싸웠습니다. 때론 파업이 성공하고 노동자들의 처우가 조금 나아졌지만, 정부의 인정 아래, 주인들에 의해 동원된 민간 경비 요원들이 총을 들고 총을 내려놔, 사망자들이 죽고 파업이 깨지기도 하였습니다. 마더 존스는 집안일에 전념하던 당시의 평범한 여성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고 하는데요. 그녀는 싸울 때마다 노동자들의 부인들을 불러 한 손에는 갓 태어난 아기를, 한 손에는 걸레를 들고 회사와 싸운다고 묘사했다고 합니다. 또는 그 여자는 오래 전에 중년의 남자 같았고, 체격은 중간쯤 되고 강했지만 뚱뚱하지는 않았으며,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라고 묘사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 남자들과 술을 마시고, 그들의 속어를 말하고, 주인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꽤 거칠게 말했는데요. 평범한 여성들은 닳고 닳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광산 노동자들은 그녀를 이해하고 존경했다고 합니다.


마더 존스는 웨스트버지니아와 콜로라도에서 광산 파업을 지지하여 명성을 얻었으며, 구원과 재판 과정에서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고 합니다. 양쪽의 파업은 강경과 정부의 주장으로 순식간에 진압되었지만, 어디를 가든 구경꾼들이 불평을 늘어놓는 등 마더 존스의 명성은 이미 확립되어 있었는데요. 물론 그것은 당연히 따라다녔습니다. 그녀가 노동운동가로 일하기 전에 그녀의 경력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의 소문이 미국의 붉은 빛 구역에서 그녀 자신의 사창가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습니다.


1903년 7월 7일, 마더 존스는 필라델피아에서 뉴욕까지 100마일을 행진하여 100명의 아동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동 노동에 항의했습니다. 3주 뒤 뉴욕에 도착한 이 단체는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지만 이후 아동 노동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1905년, 그녀는 UMW와의 오랜 관계를 조직하였고, 그 이후 사회당과 협력하여 IWW의 창설에 기여하였습니다. 1909년 그는 새로운 대통령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인터뷰했지만 물론 눈에 보이는 결과는 없었는데요. 1911년 지도부의 비리를 규탄하고 사회당을 탈출한 뒤 UMW의 일원으로 노동운동에 복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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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1805년 4월 2일 덴마크 제2의 도시 오덴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구두수선공이었고, 어머니는 세탁부였으며, 가정은 언제나 어려웠다고 하는데요. 외아들인 한스 크리스찬은 밖에서 놀기보다는 혼자 인형놀이를 즐기는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11살에 병으로 사망했을 때, 그의 가족의 생활은 더 나빠졌는데요. 초기의 재능 있는 가수이자 가수였던 한스 크리스찬은 오덴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가족을 방문함으로써 특기가 되었습니다.


안데르센은 연기자의 꿈을 접고 작가로 거듭납니다.

1819년 14세의 나이로 덴마크 코펜하겐에 도착하자 안데르센은 여러 개의 단체를 방문해 가입을 요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연기에는 소질이 있었지만,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였는데요. 운 좋게도, 안데르센은 그 당시 정치인이자 예술 애호가였던 조나스 콜린의 눈에 띄게 됩니다. 일단 기초교육을 받으면 나중엔 낫다는 조언과 함께 콜린은 안데르센에게 왕실의 보조금을 받고 수도를 먼저 떠나 중등학교로 돌아가라고 권했습니다. 1822년 안데르센은 코펜하겐에서 멀리 떨어진 슬라글세로 가서 다섯 살이나 열여섯 살, 즉 그의 반 친구들보다 더 많은 17살에 다시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창시절 죽어가는 아이라는 시로 뜻밖에 호평을 받았던 안데르센은 배우에서 화가의 길로 전향하는데요. 1828년 23세의 고인이 된 안데르센은 6년간의 공부 끝에 대학입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첫 저서 도보여행기를 출간했습니다. 1833-4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여행했으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장편소설 즉흥시인으로 극찬을 받습니다. 1835년, 그는 동화집 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출간합니다. 그의 동화를 읽은 한 지인은 급조된 시인이 당신을 유명하게 만든다면 이 동화는 당신을 불멸의 작가로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안데르센은 계속해서 엄지 공주, 꿋꿋한 양철 병정, 인어공주, 벌거벗은 임금님, 성냥팔이 소녀, 눈의 여왕, 전나무, 나이팅게일 등 200여 편의 동화를 선보입니다. 사실 그보다 약 1세대 앞서 독일의 언어학자 형제 그림이 민담을 수집, 정리하여 발표한 것이 큰 호응을 얻은 바가 있는데요. 1812년에 처음 출판된 그림 동화집은 1857년까지 일곱 차례나 개정되었다고 합니다. 안데르센의 동화는 처음에는 그림의 동화처럼 민담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나, 나중에는 순수한 창작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훈 전달보다는 서술적 서술에 초점을 맞춘 안데르센의 동화책은 발표 당시 종종 비판을 받기 일쑤였습니다.


1843년에 출간된 이 새로운 동화집에는 그의 최고의 걸작인 '미운 오리 새끼'가 수록되었으며, 그 엄청난 성공으로 안데르센의 명성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습니다. 1846년 덴마크 국민의 최고 영예인 단네브 훈장을 수여받았고, 왕족과 귀족들과 어울릴 명사가 되었습니다. 본국 덴마크에서 자주 비판받았던 안데르센으로, 감성이 크게 상했지만, 독일이나 영국 같은 외국에서는 일찍이 명성을 얻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만 가장 인기 있는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안데르센의 열렬한 팬이 되었고, 여러 번 만나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1860년대 덴마크는 전쟁의 여파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독일에 빼앗기는 등 많은 굴욕을 겪었지만, 이미 덴마크의 가장 위대한 유명인이 된 안데르센은 평화롭고 영광스러운 하루를 보냈습니다. 1867년에는 반세기 만에 고향인 오덴세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1869년에는 반세기 동안의 코펜하겐 입국을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만년에 안데르센은 류머티즘에 시달렸고, 종종 침대에 누워 그의 창조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는데요. 1875년 8월 4일 오전 11시 5분에 안데르센은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독신 생활을 하며 가정을 꾸린 적이 없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8월 11일에 덴마크 왕과 왕자를 포함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장례식에 왔지만 그와 관련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안데르센은 비슷한 시기에 일했던 그림 형제들과, 특히 창작동화 분야에서 동화의 대명사입니다. 그림의 동화가 언어학과 민담의 학문적 연구의 단순하고 직설적인 형태의 부산물이었다면, 안데르센의 동화는 빛나는 상상력과 뛰어난 묘사와 독특한 내용을 담은 본격적인 문학작품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인데요. 물론 안데르센 전후에 동화를 쓴 사람도 있었지만, 이 장르에서 그렇게 독특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안데르센은 본격적인 아동 문학의 창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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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드 마젤란은 1519년 9월 다섯 척의 함선을 이끌고 신항로 개척을 위하 항해를 떠나게 됩니다.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유럽의 식탁위에는 단조로운 식단이었습니다. 음식의 맛이라곤 싱겁거나 짜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요. 그러던 유럽의 식탁이 지금처럼 여러가지의 색깔과 향이 맴돌 수 있는 것은 바로 아시아 산 향신료의 도입이었습니다.


향신료는 원산지인 인도, 중국, 동남아에서 아랍 상인들을 거쳐 유럽에 수입되는 과정에서 가격이 엄청나게 치솟았는데요. 15세기 중반에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지중해 동부름 장악하며 유럽과 아시아 간의 육로무역이 단절되었고, 차선책으로 대서양을 이용한 해상무역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스빈다. 수많은 모험가들이 바다로 출항했으며, 동남아시아의 향료 제도까지 가는 뱃길을 개척하기 위해 바다로 나섰습니다. 위험한 바다인 만큼 실패할 경우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지만 성공한다면 막대한 부를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이전 이베리아 반도의 두 나라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해상무역의 패권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중 선수를 친 쪽은 포르투갈 이었는데요. 아프리카 서해안 탐사를 적극 지원하고 있던 엔리케 왕자의 선구적인 노력으로 1488년에는 바르톨로메 디아스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에 도착할 수 있었고, 1498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에스파냐에서는 1492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에 도착함으로써 사실상 신대륙의 발견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1519 ~ 1522년에 에스파냐에서는 사상 최초로 세계일주 원정에 성공하는 업적을 달성하였으며, 그 중심의 인물이 바로 페르디난드 마젤란이었습니다.


당시의 모험가들의 대부분은 여러 나라를 돌아다이면서 임무를 수행하다보면 똑같은 이름이 지역 위치에 따라 다르게 불리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고국인 이탈리아에서는 크리스토포로 콜롬보로 불렸다고 하는데요. 후원국인 에스파냐에서는 크리스토발 콜론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페르디난드 마젤란 또한 영어식 철자이며, 고국인 포르투갈에서는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라고 불렸으며, 후원국 에스파냐에서는 페르난도 데 마가야네스로 불렸다고 합니다. 하지면 보통은 영어식 철자가 가장 유명하기 때문에 페르디난드 마젤란으로 가장 알려져 있습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1480년에 포르투갈에서 하급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시절부터 왕궁에 들어가서 시동으로 일을 했다고 합니다. 1495년에는 인도 원정에 참여하였으며, 8년 동안 동남아시아의 여러 교역소에서 해상무역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1513년에는 모로코에서 전투를 치루다가 무릎을 다쳤고, 그로 인해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향료 제도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겠다고 다짐했으며, 포르투갈 왕실에 세 번이나 찾아가 원정 후원 요청을 하였지만 매번 거절당했습니다. 고민 끝에 마젤란은 다른 나라를 찾아가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지금 보면 마젤란은 고국을 버리고 타국으로 가서 협력을 요청하는 것이 변절자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모험을 꿈꾸고 외국 정부의 후원을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고 합니다. 가령 이탈리아인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또한 에스파냐 정부의 후원을 받았으며, 이탈리아인 아메리고 베스푸치 또한 서로 앙숙인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양쪽에서 후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젤란의 원정대 또한 에스파냐인과 포르투갈인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프랑스인, 영국인 등 다양한 국적의 선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1517년에 에스파냐 세비야에 도착한 마젤란은 국왕 카를로스 1세에 접근하기로 합니다. 그 당시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교황의 중재에 따라 서경 46도에서 30분을 기준으로 각각 동쪽과 서쪽에 대한 영유권을 소유하기로 합의한 상태였는데요. 따라서 에스파냐로서는 포르투갈의 영역인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하는 기존 향로 대신 자신들의 영역인 남아메리카 하단을 우회하는 신항로를 통해 향료 제도로 가자는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말에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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