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인 신곡의 뛰어난 저자인 단테 알리기에리 

1265년에 태어난 단테 알리기에리는 이탈리아 피렌체라는 곳에서 자랐습니다. 원래 이름은 두란테였다고 하는데 단테라는 이름은 유아세례를 받은 후에 바뀌었다고 합니다. 알리기에리 집안은 귀족으로 지내왔지만 단테가 태어난 시기에 몰락했으며 단테의 아버지는 대부업 사업을 통해 간신히 삶을 살아가고 있었답니다. 단테가 10대였을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슬픈 일이 있던 후 집안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모아놓은 재산이 있었기에 아주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전인 1274년엔 폴코 포르티나리의 집에 초대된 적이 있었는데 따님인 베아트리아를 본 후 사랑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9살의 비체와 10살의 단테는 어린 나이였지만 본인에게 있어 가장 크게 중요한 날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단테가 살아가던 관습 때문에 베아트리체의 부모님이 고른 남편감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13세의 나이에 단테는 마네토 도나티의 딸인 젬마와 10살의 나이에 약혼을 하게 되며 19살에 결혼을 했습니다. 베아트리체는 단테가 결혼한 1년 뒤에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단테는 9년이 지난 1283년 베아트리체와 길에서 만나게 되는데 인사를 주고 받았습니다. 여기서 끝난게 아니라 그날 꿈에서 사랑의 신이 나타나 베아트리체와 함께 있는 장면을 보았다고 합니다. 놀란 단테는 잠을 깬 후  계속해서 베아트리체에게 사랑이 담긴 시를 적었다고 합니다. 1290년 갑작스런 베아트리체의 죽음으로 단테는 깊은 슬픔에 잠겨 지금까지 써왔던 시들을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14세기 후반 피렌체에는 싸움이 많은 곳으로 교황파 겔프당 세력과 황제파 기벨린당의 무력 싸움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잦은 각축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겔프당인 단테는 상인파 비앙키당과 귀족파 네리당으로 나뉜 교황파 속에서 비앙키 당에 힘을 쏟았다고 합니다. 정치가로 활동했을 때엔 당과 상관없이 중립적인 위치를 지키기도 했답니다. 


약제사 조합에 들어가며 단테는 탁월한 언변 덕분에 비앙키당과 네리당 사이의 분쟁을 주도하는 사람들을 제외시키며 원한이 생긴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큰 명성을 얻었다고 합니다. 당시 샤를 백작은 프랑스 귀족으로 교황의 부탁으로 피렌체로 오고 있다는 소식에 단테는 전쟁을 멈추기 위해 교황을 설득시키며 멈췄다고 합니다. 그러나 단테가 로마에 있을 때 샤를이 네리당의 권력들과 피렌체에 오며 권위를 얻었다고 합니다. 


단테가 재판을 받은 1302년 뇌물과 비리로 유죄라는 판결을 받았는데 로마에서 피렌체로 돌아오고 있던 중 소식을 받아 돌아오지 않고 이 순간을 기점으로 타향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단테의 작품중 신곡은 가장 힘든 시기에 탄생한 작품으로 생겨났다고 합니다. 

단테가 베로나에 있었을 때엔 지옥이라는 작품 덕분에 명성이 높아졌지만 망명객이라는 신분에 편하게 지낸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조반니 보카치오가 기록했던 것에 의하면 단테를 처음 보게 된 사람들의 말은 청결하지 못한 그를 보고 놀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작품명처럼 진짜 지옥에 갔다 온 사람으로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1318년 라벤나로 온 단테는 신곡을 장식하는 천국이라는 작품을 완성시키며 질병 때문에 베네치아에서 오는 도중 1321년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살면서 19년간 망명객의 신분으로 살아가며 안타깝게 죽었다고 합니다. 100년이 지난 시간 잘못을 알게된 피렌체에선 단테의 유골을 다시 받기 위해 라벤나에게 부탁했지만 계속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단테가 죽은 후 500년이 지난 시간이 지났지만 1519년 교황이 피렌체에게 승인을 요청해서 단테의 길고 길었던 시간 끝에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단테와 베아트리체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인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인사를 제외한 다른 말은 해보지 못했을 거란 추측이 많으며 실제론 사랑에 빠질 정도는 아니였다고 합니다. 단테의 작품에서는 베아트리체에 대한 내용과 사랑이 담긴 시가 많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눈이 마주쳐서 보게 되었을 땐 말 걸기도 못했다고 합니다. 짝사랑과 상상으로만 실현된 사랑이라 말하며 거짓사랑이었다고 합니다. 문학성이 뛰어났다고 하는 단테는 망명 당시에 압수된 원고를 돌려받으며 완성시키라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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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제국의 판도를 만든 유스티니아누스 1세

동로마 제국으로도 불리우는 비잔티움 제국이 있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분열되어 있는 동서의 교회를 통합시켰으며, 이탈리아 본토 회복 및 지중해 세계의 통일로 옛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였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하여 대제국의 꿈을 이루려고 하여 대제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로마 법대전과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였습니다. 자세한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530년에는 법률 저작들을 집대성하였고 기존 학설들을 체계적으로 종합한 학설휘찬을 편찬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533년에는 법학 교재 법학제요를 편찬하였다고 합니다. 제국 안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최고 권위의 법률, 법 학설을 정리한 문헌과 법학 교육 교재를 확립시킨 것입니다. 훗날 로마법대전의 모순과 중복을 없애려고 명료하게 만들어 체계를 갖추었지만 유스티니아누스 자신의 법도 포함시켰다고 합니다.


삼촌과 다르게 학식이 깊었었던 유스티니아누스는 오래전부터 로마법을 집대하려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438년에 테오도시우스 2세가 시도했지만 황제의 칙령을 모으는데에 그쳤다고 합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트리보니아누스를 책임자로 삼았으며, 법전 편찬에 착수하였다고 합니다. 시작 14개월만인 529년 4월 칙령을 새로 모아 정리한 칙법휘찬을 완성하여 제국의 모든 법정에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폐하, 저 벨리사리우스를 이탈리아로 보내는 것에만 만족하신다면 전쟁 준비는 이대로도 완벽합니다. 그렇지만 적을 이기시려면 그 이상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장수는 부하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선 제 경호병들을 기병과 보병 모두 보내주십시오. 훈족을 비롯한 야만족 부대를 많이 보내주십시오. 병사들에게 지급할 돈을 보내 주십시오.” 벨리사리우스가 545년 5월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보낸 이 편지는 유스티니아누스가 그에 대해 취한 다분한 이중적 태도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벨리사리우스는 541~543년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도 크게 활약하였지만 그 전쟁에서도 소환당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강화 협정을 통해 일종의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협정은 비잔티움 제국이 서방에 주력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552년에는 서고트족이 지배하던 에스파냐 지역의 남부를 공격하였고 몇몇 도시들을 점령했다고 합니다.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본토, 여기에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등 지중해의 주요 섬들까지 영향권 안에 뒀으며, 유스티니아누스는 옛 로마 제국 전성기의 판도를 거의 회복하였다고 합니다.


옛 로마 제국의 전성기 판도를 회복하였다고 합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533년 벨리사리우스장군을 보내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공격하였으며 534년 항복을 받아내었다고 합니다. 535년에는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동고트 왕국의 내분을 틈타서 역시 벨리사리우스를 파견해 536년 나폴리와 로마를 점령하였고 540년 동고트 왕국의 수도 라벤나를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동고트의 새로운 왕 토틸라가 반격하자 544년 다시 벨리사리우스를 파견하여 대적케 하였다고 합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을 의심하였고 549년 그를 소환하여 나르세스 장군으로 교체하였으며, 이후 552년 나르세스가 라벤나를 다시 점령하기까지 격전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누스 1세는 518년 제위에 오른 후에 조카인 유스티니아누스를 내무대신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는 삼촌이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삼촌의 수족이자 고문 역할을 하였습니다. 유스티누스는 일반 병사에서 황궁 경비대 사령관에까지 올랐던 인물로 자신감과 포부가 컸습니다. 그리너 학식을 갖추지 못하였고 나라를 다스릴 능력도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엔 조카 유스티니아누스가 국정을 좌우하였으며, 527년 4월 유스티니아누스는 공동으로 황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해인 8월에 유스티누스가 죽음을 맞이하였고, 유스티니아누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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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로빙거 왕조의 첫번째 왕인 클로비스 1

유럽 북동부지역에 웅거하던 게르만족이 훈족에 밀려서 시작한 민족의 대이동은 새로운 유럽의 역사를 열었습니다. 서유럽지역으로 물밀듯이 들어온 게르만족은 결국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다고 합니다. 이후 유럽역사의 무대는 지중해에서 유럽대륙으로 변하였고 게르만족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게르만족의 하나인 프랑크족은 라인강 중하류 동쪽 기슭에 거주하던 여러 부족을 비롯하여 많은 소부족으로 이루어진 부족집단이였다고 합니다. 라인강 하구에서 북브라반트에 거주하는 살리족, 퀄른을 중심으로 한 리부아리족, 헨센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상프랑크족이 대표적인 3대 부족이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살리족은 5세기 초 더욱 서쪽으로 진출하였고, 클로디오 부족장 때부터 시작된 살리족의 통합은 아들 메로비스와 손자 힐데리히 1세에 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통합과정에서 힐데리히 1세는 부족장 이상의 권력을 장학하고 살리족의 통일을 상당히 이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아내를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하다. 정복자인 클로비스가 갓 세운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정복지 갈리아지역에 살고 있는 로마화된 원주민과의 화합이 무엇보다도 시급했습니다. 클로비스는 그들과의 결합을 종교를 통해 이루어냈습니다. 당시 크리스트교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공인한 로마 가톨릭과 이단으로 내몰린 아리우스파가 득세를 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와 로마의 속주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로마 가톨릭을 믿었지만 로마에서 쫓겨난 아리우스파는 게르만족 사이에 널리 퍼져 게르만족의 민족적 종교라고도 할 만한 위치를 얻었다고 합니다. 민족 대이동으로 서유럽 지역에서 들어온 게르만족들은 종교적으로도 로마화된 원주민들과 갈등을 빚었다고 합니다.

 

처음 클로비스의 종교가 무엇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우상을 섬겼다는 것으로 보아 아리우스파였던 것 같지는 않고 게르만의 전통 신을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로마 가톨릭에 호감을 가지게 된것은 부루군트 왕국의 공주였던 아내 클로틸드 때문이었습니다. 부루군트 왕국은 일찌감치 로마 가톨릭을 믿던 친 로마 게르만 왕국으로 500년경 클로비스에 의해 프랑크로 통합되었다고 합니다. 아내의 끈질긴 개종 권유를 뿌리치던 클로비스는 506년 알라마니족과의 싸움에서 거듭되는 패배의 가운데 아내가 믿는 신을 찾았다고 합니다. 이 전쟁만 이기게 해준다면 개종하겠다고 맹세한 클로비스는 결국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아내의 청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프랑크 왕국을 세우다. 각기 다른 게르만족들이 군웅 할거식으로 유럽 대륙에서 짧은 시간 동안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갈리아 지역을 차지한 프랑크 족은 새로운 유럽 역사의 초석을 닦았습니다. 그리스 로마 문명과 크리스트교, 그리고 게르만적 요소라는 세가지 키워드로 대표되는 유럽의 문화가 이 시기에 형성되어진 것 입니다. 오늘날 정신적 문화적 공동체로서의 유럽 세계는 이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처음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프랑크 왕국을 세운 왕은 메로빙거 왕조의 창시자 클로비스였다고 합니다.

 

힐데리히 1세의 외아들이었던 클로비스는 16세에 아버지를 이어 살리족을 이끌게 되었다고 합니다. 클로비스는 타고난 전사였고, 그의 이름 클로비스는 게르만 어로 위대한 전사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클로비스는 살리족의 통합에만 만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끊임없는 정복 전쟁을 통해 서유럽지역에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고 전해집니다. 481년 클로비스는 남하하여 갈리아 북부지방을 정복했고 486년경 수아송에서 북부 갈리아의 마지막 로마 총독 시아그리우스를 무찔렀다고 전해집니다. 이로써 그는 강력한 게르만 통치자의 하나로 떠오르면서 솜강에서 루아르강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여타 게르만족들과의 전쟁을 통해 로마가 다스리던 갈리아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살리족뿐만 아니라 전 프랑크족을 통일하였고 할아버지 메로비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메로빙거 왕조의 창시자로서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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