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드 마젤란은 1519년 9월 다섯 척의 함선을 이끌고 신항로 개척을 위하 항해를 떠나게 됩니다.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유럽의 식탁위에는 단조로운 식단이었습니다. 음식의 맛이라곤 싱겁거나 짜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요. 그러던 유럽의 식탁이 지금처럼 여러가지의 색깔과 향이 맴돌 수 있는 것은 바로 아시아 산 향신료의 도입이었습니다.
향신료는 원산지인 인도, 중국, 동남아에서 아랍 상인들을 거쳐 유럽에 수입되는 과정에서 가격이 엄청나게 치솟았는데요. 15세기 중반에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지중해 동부름 장악하며 유럽과 아시아 간의 육로무역이 단절되었고, 차선책으로 대서양을 이용한 해상무역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스빈다. 수많은 모험가들이 바다로 출항했으며, 동남아시아의 향료 제도까지 가는 뱃길을 개척하기 위해 바다로 나섰습니다. 위험한 바다인 만큼 실패할 경우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지만 성공한다면 막대한 부를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이전 이베리아 반도의 두 나라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해상무역의 패권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중 선수를 친 쪽은 포르투갈 이었는데요. 아프리카 서해안 탐사를 적극 지원하고 있던 엔리케 왕자의 선구적인 노력으로 1488년에는 바르톨로메 디아스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에 도착할 수 있었고, 1498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에스파냐에서는 1492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에 도착함으로써 사실상 신대륙의 발견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1519 ~ 1522년에 에스파냐에서는 사상 최초로 세계일주 원정에 성공하는 업적을 달성하였으며, 그 중심의 인물이 바로 페르디난드 마젤란이었습니다.
당시의 모험가들의 대부분은 여러 나라를 돌아다이면서 임무를 수행하다보면 똑같은 이름이 지역 위치에 따라 다르게 불리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고국인 이탈리아에서는 크리스토포로 콜롬보로 불렸다고 하는데요. 후원국인 에스파냐에서는 크리스토발 콜론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페르디난드 마젤란 또한 영어식 철자이며, 고국인 포르투갈에서는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라고 불렸으며, 후원국 에스파냐에서는 페르난도 데 마가야네스로 불렸다고 합니다. 하지면 보통은 영어식 철자가 가장 유명하기 때문에 페르디난드 마젤란으로 가장 알려져 있습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1480년에 포르투갈에서 하급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시절부터 왕궁에 들어가서 시동으로 일을 했다고 합니다. 1495년에는 인도 원정에 참여하였으며, 8년 동안 동남아시아의 여러 교역소에서 해상무역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1513년에는 모로코에서 전투를 치루다가 무릎을 다쳤고, 그로 인해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향료 제도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겠다고 다짐했으며, 포르투갈 왕실에 세 번이나 찾아가 원정 후원 요청을 하였지만 매번 거절당했습니다. 고민 끝에 마젤란은 다른 나라를 찾아가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지금 보면 마젤란은 고국을 버리고 타국으로 가서 협력을 요청하는 것이 변절자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모험을 꿈꾸고 외국 정부의 후원을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고 합니다. 가령 이탈리아인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또한 에스파냐 정부의 후원을 받았으며, 이탈리아인 아메리고 베스푸치 또한 서로 앙숙인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양쪽에서 후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젤란의 원정대 또한 에스파냐인과 포르투갈인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프랑스인, 영국인 등 다양한 국적의 선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1517년에 에스파냐 세비야에 도착한 마젤란은 국왕 카를로스 1세에 접근하기로 합니다. 그 당시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교황의 중재에 따라 서경 46도에서 30분을 기준으로 각각 동쪽과 서쪽에 대한 영유권을 소유하기로 합의한 상태였는데요. 따라서 에스파냐로서는 포르투갈의 영역인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하는 기존 향로 대신 자신들의 영역인 남아메리카 하단을 우회하는 신항로를 통해 향료 제도로 가자는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말에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