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총리의 취임은 서구 민주주의의 선구자인 영국에서 여성 총리가 등장하기 20년 전에 이루어졌습니다. 인권과 여권이 확대되지 않고 남성 잉여라는 개념이 여전히 우세했던 1960년대 아시아 지역에서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가 등장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는데요. 남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 전 총리의 후광은 1960년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의 총리로 완전히 취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세일론 총리의 총리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는 남편이 죽은 뒤 암살된 총리의 가난한 미망인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녀는 정치 전선에 개입하지 않고 조용히 있고 싶다고 말했는데요. 그러나 그녀의 남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가 남편이 죽은 후 그녀의 구심점을 잃고 분열되는 모습을 그냥 볼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진보적인 정치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를 추종한 스리랑카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분신이 필요했는데요. 오랜 역사 동안 계급사회였고 영국 식민지 이전의 왕조였던 세일론에서는 계급, 명성, 피비린내 나는 권위 등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솔로몬 반다라나이케의 아내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여자였지만 자유당은 솔로몬 반다라나이케의 다른 대안을 찾지 못했는데요.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남편의 자발적인 대리인으로 지지를 받아 1960년 5월 그가 창당한 정당인 스리랑카 자유당의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7월에는 유산계급을 보호하여 서구 중심의 통일국민당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그녀의 캠페인은 남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의 진보적 개혁에 대한 약속을 계속하는 것이었는데요.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남편의 명성에 의지하고 과부의 참상을 호소한 끝에 정치 초년병에서 일약 실론의 총리로 뛰어 오르게 됩니다.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1916년 4월 17일 스리랑카 라트나푸라 나트와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스리랑카인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신할레스족으로, 오랫동안 지역적 뿌리가 되어 온 봉건적 토지 소유자의 딸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실론 의회의 참의원이었습니다. 그녀가 자랐을 때, 스리랑카는 실론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의 통제된 식민지였는데요.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영국에서 공부하던 중 옥스퍼드 번데기리스에서 공부하는 엘리트 여성이었습니다. 스물네 살에 자기보다 25살 많은 솔로몬 반다라나이케와 결혼했습니다. 사랑의 결혼이라기 보다는 가족과 가족의 결합으로, 실론 상류층의 오랜 전통이었지만,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남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지지하며 결혼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남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는 영국 옥스포드를 졸업한 변호사였으며, 1947년 실론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51년 영국 식민지 시대의 그늘에서 벗어나 여전히 서구 지향적이고 지배적인 통일당을 위해 서 있는 스리랑카 자유당을 창당하였는데요. 스리랑카는 정결한 실론을 의미합니다. 스리랑카자유당은 통일국민당과는 달리 민족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었고 사회주의를 지지했으며, 서방세계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중립적인 외교를 펼쳤습니다. 또 불교와 국민의 70%를 차지하는 신할족의 전통문화가 중요했는데요. 그의 지지자들은 프롤레타리아, 오랜 식민지 시대에 박해받은 급진적인 불교, 전통을 존중하는 신할족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는 1956년 4대 민족사회주의 정당을 통합하여 국민연합전선을 결성하였고, 1956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총리에 올랐습니다. 이때까지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아버지 가문에 충실하고 정치에 관여하지 않은 정치가의 충실한 아내였습니다. 대신 그녀는 여느 총리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 활동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였습니다.
실론은 국민의 70%를 차지하는 불교를 믿는 신할족과 인도의 힌두교를 믿는 타밀족으로 구성되어있었는데요. 타밀족은 영국 식민지 시대에 플랜테이션 산업으로 인도에서 온 세일론과 타밀에 오래 살았던 타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세일론의 독립 이후 신할족과 국가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습니다. 당시 솔로몬 반다라나이케의 주요 정책은 신할레족과 불교를 중심으로 한 민족 통합이었는데, 이로 인해 타밀족과 분쟁에 대한 불만이 점점 더 커졌다고 하는데요.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는 대화와 타협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름진 정치적 제스처는 이전에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를 지지했던 세력을 오해했습ㄴ디ㅏ. 그들은 솔로몬 반다라나이케가 배신했다고 생각했는데요. 1959년 9월 25일,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는 타밀족에 대한 그의 대응에 불만을 품은 승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맙니다.
새로운 운명이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20년 동안 남편을 믿고 오로지 아버지에게만 집중했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세상 사람들의 동정을 피해 조용히 은퇴하려 했으나 곧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는데요.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남편을 잃고 이듬해 5월 스리랑카 자유당 당수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습니다. 이후 선거에서 그녀는 남편의 유지에 따라 사회주의 공산당과 공동 전선을 구축하였고, 세일론 이스티즘의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여 대중을 지지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