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로마를 건국한 콘스탄티누스 1세

“역사상 그 어느 지배자도, 알렉산드로스도, 앨프레드도, 샤를마뉴도, 예카테리나도, 프리드리히도, 그레고리우스도, 콘스탄티누스만큼 ‘대제’라는 칭호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인물은 없습니다. 영국의 역사가 존 노리치는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이렇게 콘스탄티누스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 이유는 콘스탄티누스가 전통의 다신교 대신 기독교를 로마의 사실상의 국교로 정립하고, 전통의 로마 대신 비잔티움, 즉 콘스탄티노플을 제국의 새로운 중심지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콘스탄티누스는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새로운 로마를 건국하였으며, 그 영향은 로마가 사라진 이후에도 서양 문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3세기에 들어서며 아우렐리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라는 걸출한 황제가 잇달아 나타났으며 이런 혼란은 일단 진정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방대한 제국을 넷으로 나눔으로써 당시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수도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와 일리리아, 갈리아, 에스파니아, 북아프리카를 서로마로,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이집트를 포함한 오리엔트 지역을 동로마로 나우었으며, 각각의 정제가 다스리게 하고, 동서로마는 다시 한사람씩의 부제가 다스리는 독립 영역을 가짐으로써 네 사람의 황제와 네 개의 제국이 분립된 것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분치제는 나름대로 효력을 발휘하여, 갈리아와 이집트의 대반란이 평정되고 페르시아에게도 승리하여 아르메니아를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분치제는 한 가지 뚜렷한 모순을 안고 있었습니다. 네 사람의 황제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다면 어느 한 황제가 다른 황제의 지배영역을 탐내는 것입니다.


젊은 콘스탄티누스는 ‘인품, 외모, 체력, 키’ 모든 면에서 남들을 압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를 최고의 영웅으로 묘사한 유세비우스의 말인 만큼 덜어서 들어야 할 지 모르겠지만 이미 청년기에 그의 명성은 로마에 자자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훤칠하게 큰 키가 인상적이였다고 하네요. 누구도 그를 감히 패배자로 낮춰볼 여지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전 생에 걸쳐 승리자로 살았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사분치제의 한 축을 맡고 있던 콘스탄티우스 부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사분치제의 모순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조치의 일환으로 서로마의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보내져 사실상의 인질이 됩니다. 젊은 콘스탄티누스는 이 개혁적인 황제를 따르며 많은 것을 배웠는데 다만 그가 로마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추진했던 기독교 박해만은 공감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독실한 기됵교 신자였던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에게서 받은 영향도 있었으며, 당시는 이미 제국의 하층민 뿐만 아니라 귀족, 학자, 군인 등이 속속 기독교로 개종하고 있었던 상황이였기 때문에 이미 힘을 잃은 옛 종교에 매달리는 일은 현명치 못하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로마가 겪고 있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회심의 조치였으며 일단 제국의 국경은 너무나 길고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은 너무도 많았으므로, 한 사람의 황제가 중앙에서 동시에 대응하기는 무리라고 여겨져 네 사람의 황제가 각기 맡은 쪽에서 효과적으로 방어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본래는 중앙에서 파견된 점령군이었던 로마 군단이 세월이 지나며 파견된 지역에 뿌리를 내려 토착화하였습니다. 머나먼 중앙과의 연결고리가 희미해졌으므로 더 이상 로마에 앉아서 여러 변방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없는 점도 고려되었다고 합니다. 5현제 시대까지 팽창과 집중화를 계속했던 로마는 이제 분산과 분열의 흐름을 타고 있었던 것이였습니다.


이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적어도 서구 역사에 콘스탄티누스가 미친 막대한 영향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 입니다. 그가 태어날 때의 로마는 약 3백 년 전 로마 제국이 세워질 때의 로마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제국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5현제시대’를 지나 약 50년간 18명의 황제가 쿠데타와 암살을 반복하며 잇달아 나타나고 사라져가는 ‘군인황제 시대’의 혼란기가 왔습니다. 이처럼 정치가 혼란스러웠을 뿐 아니라 내적으로 경제력과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고, 외적으로는 게르만족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입이 끊이지 않는 내우외환에 빠져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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